씨의   道 지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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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든 까닭

   고전 종교 철학 사상의 근간을 이룬 것은 아마도 아시아 유럽을 막론하여 지금부터 2,500년 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 당시에 비롯되었거나 풍미했던 사상적 기반이 오늘날까지 이어와서 발전한 것으로 유럽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뿌리인 유대인의 사상과 그리스철학 그리고 지나(지금의 중국)의 유가사상 인도의 불교사상 등 모두 이 시기에 그 태동기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지나의 유가사상과 대응을 이루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이는 사상이 노장사상인데 이는 유가의 논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면서도 소멸되지 않고 이어진 것은 유가는 형식과 틀에 의해 견고하게 이어진 반면에 노장사상은 온갖 잡설과 미신 그리고 신화로 범벅이 되면서도 그 기본사상이 이어진 것은 많은 부분이 사람들에 내면에 설득력이 있게 와 닿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동북 아시아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쳐온 도가사상과 유가사상은 항상 대비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떤 이는 유가는 어린이를 위한 교과서이고 도가는 어른을 위한 교과서라고 말하였듯이 도가의 이론은 질서의 강요 보다는 스스로 내면의 다스림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도가의 논리적 방법은 '역설'에  있는 데,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도 '역설의 논리'가 제기 되었느나 궤변론자로 터부시되어 지나에와 마찬가지로 2000년 넘게 주류의 사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장 주된 원인은 아마도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란 힘을 가진자의 지배에 의한 질서가 중요시됨으로 인하여 교육의 필요성도 질서의 순응하는 권력자에 입맛에 맞는 논리이여야 함으로 '역설'보다는 순응을 당연시하는 논리가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온 A형 논리가 채택되고 E형논리는 이단으로 몰았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유가는 정통학문으로 대접받고 도가는 잡술 정도로 천대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상과 철학은 어느 집단계층의 입맛에 따라 편파적인 판단보다는 인간 모두를 아우르는 잣대로 보았을 때 두가지 다 중요한 이론이며 가치있는 사상일 것이다.
 그 중에 동북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도가사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도덕경>을 지나의 글자로 표기한 것을 우리의 생각과 생활의 표현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우리말에 가장 가깝도록 다시 쓰여 보고자 웹문서로 만들어 보았다.

한들 _ 2005.08.15

  ■  글쓴 모양

 ㅇ 몇 章  

 

 노자 도덕경(지알) 원문을 표시함

 

 =  풀이1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 한자말은 모두 버리고 순 우리말로 풀이한 글

 -  풀이2 : 억지로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 오히려 현대 사용하는 용어에 어색한 면이 있거나, 의미전달이 모호한 것을
    우리말을 고집하지 않고 해석을 해여 의미전달에 충실하도록 함

 *  풀이3 : 도덕경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다시 풀이하거나, 원 뜻을 달리 해석하는 등의 주석문에 해당하는 글
 

 

  ■  내 생각

  내생각
  = 노자는 실존인물인가?
  노자의 실존이냐 도덕경이 한사람의 작품이야 하는 논란은 반즘 맞고 반쯤은 덧댄 이야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공자와 비슷한 시기에 실존한 인물은 사마천의 <사기>에 언급한 대로 맞을 것이며, 공자와 만났다는 것은 후세에 추측한 것이 보여진다. 왜냐하면 공자의 가르침(논리)는 질서와 인위적인 禮를 강조한 군왕에게 유리한 이론으로 많은 위정자에게 채택되어 보급되고 춘추전국시대의 질서 재편에 가세하여 일종의 대세를 가지는 학설이 되지만, 어떤 학설이든 거기에 상응하고 반대되는 학설이 있기 마련이듯이 춘추전국시대에 군왕의 지배논리를 합리화 시켜주는 공자의 학설과는 달리 소위 '무정무주의'에 가까운 학설은 수많은 전란으로 '나라와 군왕이 내게 해 준 것이 뭐 있나'식으로 수탈되는 일반인(백성)들에게는 공자의 질서재편의 가르침 보다는 이에 반하는 이론이 더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도덕경이라는 이론은 피지배층인 사람들에게 널리 문자보다는 구전으로, 체계적이기 보다는 덧대고 빠지는 글로 퍼져 나가 하나의 종교로 가공되어지면서, 처음에 노자(이이)라는 사람이 주장이 된 이론일지라도 당시에 풍미된 이론이 더하여지고 처음 주장이 된 인물은 더욱 신화화 되어 신격화로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 도덕경은 순순한 노자의 작품인가?
  도덕경 전반에 흐르는 "역설"의 이론은 가히 중국의 여러 학설에서 유래가 드문 톡특한 방법을 취하면서, 인위적인 것 보다 자연스럼움을 강조하는 내용은 일관되므로 노자 한사람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각 장의 내용을 보면 문맥의 흐름이나 의도적인 설명과 중복.부연이라고 느껴지는 문장 등을 봐서는 후대에 많은 이들이 가필하여 전하였거나, 도덕경이 만들어 지는 시기에 난무하는 여러 경우의 설을 모두 주워 모우다 보니 그렇게 된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도덕경 5천언은 가히 하나의 일관된 논리를 가진 사상 이론으로서의 작품이라 할수 있다

  노자 : 이름은 李耳. 字는 聃. 老聃이라고도 한다. 楚나라 苦縣(하남성[河南省:허난성] 鹿邑縣) 출생. 春秋시대 말기 周
        나라의 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낙양[洛陽:뤄양]으로 노자를 찾아가 禮
       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
      ( 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참고 M. Kaltenmark 글 가운데서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BC 1111경~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초(楚)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주나라의 태사(太史)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이 진(秦:BC 384~362)의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超人)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莊子)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은 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가계(家系)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李)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聖人集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인으로서의 전설

〈사기〉의 노자전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聖人傳)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뒤 종교계에서 성전(聖典)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姓)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李木]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李)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 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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